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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고용골에서 추파선생을 뵙고 신선봉 넘어 충암선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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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돌까마귀 작성일 2015.05.09 10.03 조회수 3760

언   제:2015.5.9(금)

어디로:대전 동구 주산동 고용골-비룡동 길치들-덤벅골-비름들-신선봉-엉고개-제방길-신상교-바깥아감-묘골-바깥아감-세천삼거리

누구와:(사)대전문화유산울림의 제6차 대전문화유산답사팀과 함께

 

09:30 대전역 동광장 발, 직동행 60번 외곽버스를 타고 동구 주산동 금성마을 입구에 내려

북쪽 산기슭의 추파선생 묘소를 건너다 보고

고용골 마을길(대청호수로315번길)로 들어가 象谷祠 앞에서 사적비를 살펴보고 

 

 

추파묘소에 올라 거대한 문인석에 놀란다.

상곡사로 되돌아 내려와 

 

 

길치고개로 가는 길에 지난 2014년 1월에 발견한 바위구멍도 살펴보고

거북바위공원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신상로로 명명된 폐 경부고속도로를 가로 질러 비룡동으로 넘어가서

길치들1,2호, 덤벅골1,2호, 비름들바위구멍을 두루 살펴보는데 안타깝게도 송석정의 소나무가 고사 직전이다.

안평이씨열부정려각 앞을 지나 대청호수로와 신상로가 교차하는 굴다리를 지나 신선봉유적을 찾아 올라서니

탁트인 조망에 일행은 탄성을 터트리고

바위속에 새겨진 각자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판암IC를 지나 국도4호선 옥천로를 따라 동신고등학교 앞을 막 지나 비룡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대청호수로에 진입하여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 신상로로 이름이 바뀐 폐경부고속도로 비룡교차로 굴다리를 지나면 얕은 고개마루 우측에 신선봉 유적지를 가리키는 오렌지색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걸어서 10분도 되지 않는 곳, 산 정상 조금 아래에 역시 ‘신선봉유적지(기념물 제32호)’로 표시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정상으로 오르는 소롯길에도 휴식할 수 있는 의자들이 놓여 있고, 대청호 오백리길임을 알리는 표지들도 부착되어 있다. 과거에 이곳을 찾느라 헤맸던 때를 생각하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디어 정상을 오르니 신선바위가 우리를 반기듯 했다. 산꼭대기에 세워져 있는 큰 바위는 그대로 집 모양이다. 판석(板石)형태의 거대한 바위가 지붕처럼 올려져 있고, 석축 내 중앙부위는 절반이 갈라져 겨우 한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통로가 만들어져 있다. 고색창연한 집채만한 바위들이며 주변의 경관을 보면서, 회원들은 마치 신선이 사는 곳에 온 것 같다며 탄성을 자아낸다. 사실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신선바위라 불렀고, 바위의 영험함 때문에 사람들은 기자(祈子)나 구복(求福) 목적으로 기도를 올리며 신성시 여기고 있다.이곳은 과거 역학자로 이름난 야산(也山) 이달(李達)선생의 자취가 서린 곳이다. 통로 가운데 한쪽 면에는 ‘佛(불)’자가 크게 주서(朱書)되어 있고, 맞은 편에는 흘려 쓴 ‘호신발(號神發)’과 그 옆에 해서체로 ‘惺惺主人翁 皇皇上帝位(성성주인옹 황황상제위)’라 음각되어 있다. 범상치 않은 이 명문(銘文)의 제작자에 대해서 세간에 억측이 구구하지만 오래전부터 야산선생의 제자들은 이곳을 성지로 삼고 출입해 왔었다.

‘호신발’은 야산선생의 필체고, 옆의 각자는 송대오재(宋大悟齋)선생을 지칭한 것이다. 두 분은 사돈지간이 되는데, 대오재선생은 이름이 을규(乙奎)로 은진송씨며 추파공 후손이다. 필자가 야산선생의 제자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바위에 새겨진 글은 대오재선생이 제안하고 야산선생이 새겼다 한다. 이곳 비룡마을은 대오재선생의 고향이고, 비룡봉을 포함해서 주변이 송씨 문중의 소유지인 관계로 야산선생은 이곳에 ‘호신발’이라는 글자를 刻印(각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오재선생을 두고 당시 사람들은 심성이기(心性理氣)를 통한 사람이라 말했다. 그는 구한말 지리산 청학동에 거주하였던 문도사의 수제자라 하는데, 문도사는 구한말 4대 기인(문화재, 김일부, 강증산, 박만수)중의 한 사람으로 지리산 청학동의 선맥을 이은 사람이다. ‘성성주인옹’이 바로 대오재의 별호가 되니, ‘주인옹’은 이 몸의 주인이 되는 본래의 마음을 가리킨 것이고, ‘성성’은 깨달음의 뜻이다. ‘성성주인옹’ 옆에 ‘황황상제위’라 쓴 글에 대해서는 표현하신 분의 경지를 감히 엿볼 수 없지만 아마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이룬 뜻에서 대귀로서 표현한 것이리라. 하여간 당시 사람들은 선생을 ‘성성주인옹’이라 불렀고, 선생의 집앞 현판에 ‘성성주인옹 황황상제위’라는 글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 바, 선생의 별호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호신발’은 언제 새긴 것일까? 필자는 이 글을 야산선생이 새겼다는 말만 들었을 뿐,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다만 선생의 문집(文集)을 보면 호신발에 관련한 시가 두 편 있는데 모두가 이 바위에 새겨진 ‘호신발’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 중 ‘井田付食水盆(정전부식수분)’이라는 제하(題下)에 쓴 시를 소개하면,

一簣石井作崑崙(일궤석정작곤륜) 한 삼태기 돌우물에 곤륜산을 지었는데

天遺黃河水滿盆(천견황하수만분) 하늘이 보낸 황하수 동이에 가득하네

若待飛龍神號發(약대비룡신호발) 만약 비룡신이 호령 발하기를 기다린다면

爲雲爲雨入仙門(위운위우입선문) 구름 되고 비가 되어 선문에 들어가리

이 시는 6.25사변(음5월 10일)이 일어나기 한 달 전(음4월8일)에 지은 시다. 안면도 개락금(開洛金:정당리)이라는 곳의 집 앞 우물 안에 물동이와 그 속에 촛불을 켜놓고 선생은 고천(告天)한 적이 있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작시한 것이다. 생각건대, 정전(井田)이란 오덕지(五德地)를 말하니 5.10의 의미가 있다. 음력 5월 10일은 전쟁이 일어난 날이니 첫 구절의 돌우물(石井)은 전쟁이 일어날 것임을 예견한 것이고, 둘째구절의 동이에 물이 가득 찼다는 것은 세상을 살려야 될 때가 무르익었다는 뜻이겠고, 셋째구절은 전쟁기간을 잘 참고 때오기를 기다리라는 내용 같고, 넷째구절은 후천선경의 태평시대가 되리라는 뜻이리라. 뜻이 이러하다면 이 시에서 나오는 ‘신호발’은 전쟁과 관련해서 지으신 것 같다. 다른 시에서 나오는 ‘號神一發(호신일발)’의 글도 전쟁 중에 지은 시에서 나온 것이다. 혹시 이 시에서 ‘비룡’은 비룡산을 가리키고 ‘신호발’은 바위에 새긴 호신발을 지적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신선바위에 새긴 ‘호신발’은 6.25동란의 전후에 즈음해서 새긴 것이 아닐까? 그리고 ‘호신발’ 속에 동란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 비책(秘策)을 담지는 않았을까? 우둔한 필자로서는 억측아닌 억측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꼭 전쟁에 한정해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되겠고 아마도 ‘호신발’ 세 글자 속에는 무궁한 뜻이 담겨 있으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주역』에 ‘음양불측(陰陽不測)’을 신(神)이라 표현했다. 두 분의 신도세계(神道世界)를 우리 같은 범인이 어찌 짐작하랴! 다만 올 임진년 용(龍)의 해에 비룡이 승천해서 호령을 발하고, 감우(甘雨)의 은택을 베풀기를 회원들과 천만축수(千萬祝手)하면서 일정을 마쳤다. <대전동방문화진흥회 카페에서 인용>

 

다른 카페의 글에서"호신발"이란 "호를 천지신명께 고한다"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청고선생과 그 제자들은 제를 지내고.바위틈으로 들어가 "호신발"을 크게 외친 다음 자기의 호를 크게 외친답니다. 청고선생의 스승이신 야산선사께서 직접 글을 음각하였고 "호신발"을 마친 야산선사는 축지법을 써 대천의 용굴로 가셨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답니다. <학이지탐방에서 인용>

 

 

주산동과 신상동을 가르는 능선을 따라 엉고개로 내려와

넓은 대청호를 가로 지르는 오리골 옛 저수지의 제방길을 지나 신상교 밑에 닿으니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 호반낭만길이 끝나고 5구간 백골산성낭만길의 시작점이다.

넓디 넓은 대청호엔 물새가 나르고 발걸음은 웃말에서 바깥아감으로 나가 회남길을 따라 묘골에 닿으니 

혼자서 넓은 묘소를 지키던 관리사 아주머니가 반겨 주시고

<산해당>

 

충암 김정선생의 묘소는 5월의 태양을 받은 잔디에 빛이 난다. 

<정려각>

김정선생묘소일원 (金淨先生墓所一圓)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

주소:대전 동구 회남로 117 (신하동)  수량/면적: 묘 1기/ 48.6㎡, 정려각 1동/ 32.1㎡, 별묘 1동/32.7㎡, 산해당 1동/ 102.2㎡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 겸 예문관 제학을 지낸 충암(沖庵) 김정(1486∼1521)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건물이다. 선생은 조광조와 더불어 지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미신타파와 향론의 상호부조에 힘썼고, 향약을 전국에 실시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금산에 유배된 후 제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대덕구 동면 내탑리에 있던 건물과 묘소를 1978년에 동구 신하동으로 옮겼다. 건물 안에는 인조 19년(1641)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부인의 정려각이 있다.<문화재청 우리지역문화재>

 

회남길을 되돌아 나오며 신상로(폐 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 굴다리를 지나 세천삼거리에 닿으니 

93 대전엑스포를 기념하여 조성된 새마을헌수공원 옆 버스승강장에 대전역-복합터미널-비래동종점행 607번 버스가 바로 달려온다.